5 research outputs found
Polypharmacy based on the data of inpatient assessment for elderly cancer patients in general hospital
학위논문 (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간호학과 간호학전공, 2016. 8. 박연환.본 연구의 목적은 노인 암환자가 증가함에 따라 노인 암환자의 올바른 약물 사용 및 관리를 위한 기초자료를 제공하기 위해 종합병원에 입원하는 노인 암환자의 다약제 복용(Polypharmacy) 현황을 파악하는 것이다.
본 연구는 2015년 1월 1일부터 3개월 간 자료를 분석한 후향적 조사연구이며, S대학병원 암병동에 입원하는 65세 이상 노인 암환자 170명을 대상으로 시행하였다.
자료수집은 전자의무기록(EMR, Electronic Medical Record)을 활용 하였으며 약물의 조사는 입원 당시 매일 복용하고 있는 자가약물 중 주사약과 외용약은 제외하고 경구약을 대상으로 조사하였다. Beers Criteria를 사용하여 노인에게 잠재적으로 부적절한 약물사용을 조사하였으며, 약물-약물 상호작용 위험성 약물은 식품의약품안전처에서 발간한 노인에 대한 의약품 적정사용 정보집을 참조하여 분석하였다. 자료분석은 교차분석, t-test, One way-ANOVA test를 통해 분석하였다.
대상자의 연령은 평균 72.3(±5.43)세였고 남성이 110명(64.7%), 여성이 60명(35.3%) 이었다. 대상자의 87.1%가 1개 이상의 만성질환을 가지고 있었으며 평균 1.9(±1.4)개의 만성질환을 가지고 있었다. 암 종류는 대장직장암이 22.9%로 가장 많았으며 폐암 11,8%, 위암 11.2%의 순으로 많았다. 입원 목적은 항암화학요법이 30.6%, 검사가 30.0%, 수술이 22.9%였다.
대상자들이 일일 복용하고 있는 자가약물의 개수는 평균 5.3(±3.3)개였으며 55.9%가 5개 이상의 다약제 복용을, 10.0%가 10개 이상의 과도한 다약제 복용을 하고 있었다.
Beers Criteria에 의한 노인에게 잠재적으로 부적절한 약물 복용은 30.0% 환자의 62례에서 확인되었으며, 약물-약물 상호작용 위험 약물 복용은 21.2% 대상자의 50례에서 확인되었다.
만성질환의 수가 많을수록 복용하고 있는 약물이 많은 것으로 조사되었으며, 복용하고 있는 약물이 많을수록 노인에게 잠재적으로 부적절한 약물 복용과, 약물-약물 상호작용 위험 약물을 복용하는 빈도가 높아지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따라서 노인 암환자의 다약제 복용을 최소화하여야 하며, 노인에게 잠재적으로 부적절한 약물과 약물-약물 상호작용 위험성 약물 투약을 모니터링 할 수 있는 약물 감시 체계 시스템 구축이 필요하다.Ⅰ. 서론 1
1. 연구의 필요성 1
2. 연구의 목적 5
3. 용어의 정의 5
Ⅱ. 문헌고찰 7
1. 노인 약물사용의 특성 7
2. 노인의 다약제복용 현황 9
3. 노인 암환자의 약물복용 실태 12
Ⅲ. 연구방법 15
1. 연구설계 15
2. 연구대상 15
3. 연구도구 16
4. 자료수집절차 18
5. 윤리적 고려 19
6. 자료분석방법 19
Ⅳ. 연구결과 20
1. 대상자의 일반적 특성 20
2. 대상자의 질병관련 특성 22
3. 일일 복용하는 자가약물의 개수 25
4. 노인에게 부적절한 약물 복용 27
5. 약물-약물 상호작용 위험성 약물 복용 29
6. 다약제 복용, 부적절한 약물 사용, 약물-약물 상호작용 위험성 관련요인 32
Ⅴ. 논의 35
Ⅵ. 결론 및 제언 45
참고 문헌 48
부록 60
Abstract 69Maste
A Study of Modern Chinese Diplomatic Office in Korea and Sino-Korean Modern Diplomacy
학위논문 (박사) -- 서울대학교 대학원 : 사범대학 사회교육과(역사전공), 2020. 8. 유용태.본 연구는 청이 불평등조약과 서양 국제법 서적을 통해 주외공관 제도를 수용하는 과정을 분석한 다음, 이것이 주한공관 설립과 한청 근대외교로 이어지는 모습을 고찰하였다. 이 과정에서 전통외교와 근대외교 각각에서 유래한 합리성과 제국성이 작용하는 양상에 유의하였다. 요컨대, 외교학의 용어와 개념은 물론 주외공관의 운영 원리에 착목하여 청의 주한공관을 체계적으로 밝힌 개척적인 연구라 할 수 있다.
청은 아편전쟁으로 체결한 불평등조약에 따라 주외공관 제도를 수용하였다. 이후 열강이 속속 설립한 주청공관은 자국인을 보호하고 외교 협상을 효과적으로 전개하는 한편, 영사재판권·포함외교 등을 통해 자국의 이익을 확보하였다. 한편 이 시기 청에 번역 소개된 만국공법 등의 서양 국제법 서적 또한 주외공관의 역할, 권리, 의무 등을 총체적으로 설명하는 한편, 非서구에 대한 영사재판권과 포함외교를 정당화하였다. 이를 통해 청에서는 합리성과 제국성으로 대표되는 주외공관 인식이 형성되었다. 본고가 불평등조약과 서양 국제법 서적에서 公使·領事 등의 번역어가 정착되는 과정을 분석한 결과는 청의 주외공관 인식이 심화되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외 위기가 고조되자, 청 정부 내에서는 상주사절 파견론이 대두하였다. 그 결과, 청은 영국을 시작으로 해외 각국에 공사관을 개설하고, 싱가포르 등 청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에는 영사관을 설립하기 시작하였다. 청의 주외공관은 현지에서 교섭 사무, 자국민 보호, 정보 수집 등 다양한 업무를 수행하였다. 이는 청이 불평등조약에 따라 설립된 열강의 주청공관을 관찰하고, 서양 국제법 서적을 번역 이해한 결과였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1883년 청은 첫 번째 주한공관으로서 주조선상무서를 설립하였다. 그런데 주조선상무서는 분명 근대외교의 산물이었으나 청과 조선은 아직 전통외교를 적용하고 있었다. 따라서 주조선상무서는 전통외교와 근대외교가 착종된 과도적 형태의 주한공관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청이 진수당의 직함을 총판상무위원이라 하면서도 사실상 총영사의 지위를 부여한 데서도 잘 나타난다. 진수당은 주로 청 상인의 경제적 이익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제국성을 표출하였고, 이를 합리성으로 분식하기 위해 전통외교와 근대외교를 선택적으로 활용하였다. 이 시기 한성·인천·부산·원산에 설립된 주조선상무서는 판리조선상무장정을 토대로 운영되면서 진수당의 활동을 뒷받침하였다.
1885년 청은 진수당을 경질하고 그 후임으로 원세개를 임명하였다. 이때 원세개에게는 총리교섭통상사의라는 직함과 총영사 겸 4등공사라는 지위가 부여되었다. 본고는 원세개가 지닌 4등공사의 지위에 주목하여, 이것을 원세개가 상국의 대표로서 조선의 외교를 주지한 법적 근거였음을 밝혔다. 그러나 원세개는 외교뿐 아니라 내정에까지 개입하였고, 이 과정에서 전통외교와 근대외교를 선택적으로 구사하여 제국성을 더욱 강렬히 표출하였는데, 이는 원세개의 독단적인 판단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청 정부의 암묵적 동의에 따른 것이었다. 이 시기 원세개가 임기를 마친 후에도 두 차례나 더 유임되었고, 주조선상무서의 규모가 대폭 확장되고 용산상무서가 신설된 것은 원세개의 활동을 뒷받침하는 토대로 작용하였다.
그러던 중 청일전쟁이 일어나며 주조선상무서는 폐쇄되었다. 그러나 청은 1896년 총상동·총영사 당소의를 파견하여 주조선영사서를 개설하였다. 이때 당소의가 비공식 사절을 자처하였던 만큼, 주조선영사서 또한 비공식 기구에 머물렀다. 청이 자국민을 보호하면서도 조선의 수교 요구는 거부하기 위해 일종의 편법을 사용했던 것이다. 청은 마지못해 수교를 결정한 다음에도 4등공사 또는 흠차대신을 파견하려고 하는 등, 여전히 대한제국에 전통외교를 적용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1899년 한청수교가 이루어진 후, 청은 두 번째 주한공관인 주한공사관·영사관을 개설하였다. 이는 결국 청이 대한제국에 근대외교를 전면 적용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주한공사 서수붕, 허태신, 증광전은 서양 국제법과 한청통상조약에 근거하여 교섭 사무를 처리해 나갔고, 이 무렵 신설된 外務部가 주외공관 제도의 개편에 나서면서 주한공사관·영사관의 합리성은 한층 보강되었다. 이 시기 청이 제국성을 표출하기 어려워진 상황과 달리 대한제국에서는 열강을 모방한 제국성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제1·2차 한일협약 이후에는 청의 주한공사관이 철수하고 주한영사관이 그 공백을 채웠다. 이 시기 한국총영사 마정량은 주한공사에 버금가는 권한을 지녔고, 주한영사관의 규모는 더욱 확장되었다. 본고는 이 시기 청 정부가 주외공관 제도를 개편하면서, 주한영사관의 관제가 개편되고 관원에 대한 대우가 개선된 것에 주목하였다. 이는 대한제국이 국권을 상실해 가는 상황에서도 청의 주한공관이 지닌 합리성이 증진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한국총영사 마정량은 각종 현안을 교섭하는 과정에서 합리성을 내세웠지만, 대한제국을 매개로 일본이 표출하는 제국성에 대응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그리고 한일병합으로 대한제국이 주권을 상실한 후에도 주한영사관은 주조선영사관으로 명칭을 바꾸어 존속하였으나, 한청관계가 일청관계로 대체되었기에 그 위상은 점차 낮아졌다.
본 연구에서 청말 주한공관을 한청관계의 맥락 위에 놓고 전통외교와 근대외교의 착종 과정에 주목한 것은 선행 연구의 보완과 연구 지평의 확대라는 측면에서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째, 중국외교사의 측면에서, 청의 주한공관은 중앙 정부와 개인 차원의 외교 행위를 상호 관련성 속에서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발판이 된다. 특히 청의 근대외교는 합리성을 갖추고 있었던 것은 물론 속국에 대해서는 명백히 제국성을 띠었던 만큼, 청의 근대외교가 지닌 후진성이나 反침략성을 강조해 온 선행 연구의 관점은 재고될 필요가 있다. 둘째, 한중관계사의 측면에서, 청의 조선 정책은 전통외교와 근대외교 양쪽 모두에서 유래한 합리성과 제국성이 길항하는 과정에서 그 양상을 달리하였음을 규명하였다. 따라서 청의 조선 정책을 전통적인 속방 체제의 강화 또는 근대적 제국주의 어느 한쪽으로 이해하는 것보다는 양측 모두가 착종한 양상에 주목하는 것이 적절하다.This study examined the way in which Qing dynasty had introduced the diplomatic office system through unequal treaties and the Western international law books, and figured out relevance between Qings diplomatic offices in Korea and Sino-Korean modern diplomacy. In particular, this article paid attention to the manifestation that rationality and empireness of the diplomatic offices appeared and the aspect that the traditional diplomacy and modern diplomacy competed.
In premodern times, traditional diplomacy based on tributes and installation was widely practiced in East Asia. But traditional diplomacy shook and modern diplomacy spread after the Opium War. In particular, the diplomatic offices of Western powers were symbol of modern diplomacy.
Qings understanding of the diplomatic office deepened through unequal treaties and Western international law books. The unequal treaty that Qing dynasty signed with the Western powers included clauses related to the diplomatic offices. The Western international law books introduced by Qing also included contents related to the diplomatic offices.
In short course, the idea of dispatching resident envoys emerged in the Qing government. In this situation, Qing started to set up legations and consulates abroad. The diplomatic offices of Qing dynasty carried out various tasks, including negotiation affairs, protection of citizens, and gathering information. These diplomatic offices were based on the reference of the Western powers' diplomatic offices and Western international law books, therefore they contained both rationality and empireness of modern diplomacy. Paradoxically, rationality and empireness were fully expressed in the East Asian country.
Qings diplomatic offices in Korea can be explained in terms of rationality and empireness, and the change of Qings diplomatic offices in Korea can be divided into the following two periods.
The first phase is the founding period of the Qings diplomatic offices in Korea. In this period, Qing aimed at making the Chosun her vassal state through the Commercial Affair Office. The General Commissioner of Trade Chen Shu-Tang established several Commercial Affair Office. In fact, the Commissioner of Trade was equal to the consul, and the Commercial Affair Office was equal to the consulate. But Qing avoid the term consul, consulate to emphasize the vassal status of Chosun. Yuan Shi-Kai as a successor to Chen Shu-Tang corresponded to diplomatic minister. In this period, Qing and Chosun experimented the modern diplomacy through the diplomatic offices, but the traditional diplomacy was still valid. Qing made a use of modern diplomacy and traditional diplomacy arbitrarily.
The second phase is the completing period of the Qings diplomatic offices in Korea. In 1896, Qing established the consulate in Korea to protect the Chinese and avoid Chosuns call for diplomatic ties. After deciding to establish diplomatic ties, Qing planned to dispatch the fourth minister, and soon changed it to the minister plenipotentiary. This phenomenon symbolically shows the shift from traditional diplomacy to modern diplomacy. In 1899, Qing established a legation and consulates after concluding Sino-Korean treaty of commerce. The ministers of Korea treated the negotiation with Korea on the basis of the Western International law and Sino-Korean treaty of commerce. At that time, Qing established the Department of Foreign Affairs to reform diplomatic institutions. As a result the rationality of modern diplomacy increased, but the empireness of modern diplomacy was difficult to appear. In 1906, Qing decided to withdraw legation of Korea by request of Japan, and the consulate then dealt with task of the legation. Accordingly, consul general of Korea Ma Ting-Liang came close to minister of Korea, and the consulate grew in size. At that time, Qing government reformed the diplomatic office institutions, so consulates of Korea were reformed and diplomat treatment improved. After Japan-Korea Treaty of 1910, Sino-Korean relations ended, but the consulate of Korea still maintained changing its name to consulate of Chosun. In short, the consulate of Korea had developed in a way that enhances the rationality of modern diplomacy, but had to defend against Japanese empireness.
This study has the following meanings in terms of supplementation of prior research and expansion of research horizon. First, this article revealed that Qings empireness before Sino-Japanese War had come from both traditional diplomacy and modern diplomacy. Therefore preceding researches which have judged Qings Chosun policy traditional or modern need to be reconsidered. Second, this article discovered the rationality from modern diplomacy in proceeding of Sino-Korean relations. Several preceding researches didnt stress on the development of Sino-Korean relations. It is clear that the rationality of modern diplomacy increased in this time.제1부 淸末 駐外公館 制度의 도입 15
Ⅰ. 제1·2차 아편전쟁과 주외공관 제도의 유입 15
1. 해외 각국의 주청공관 설립 과정 15
2. 불평등조약의 領事·公使 번역 양상 26
Ⅱ. 서양 국제법 서적과 주외공관 제도의 이해 32
1. 윌리엄 마틴의 서양 국제법 서적 번역 32
2. 서양 국제법 서적의 주외공관 제도 서술 39
Ⅲ. 주외공관 제도의 구상과 실천 54
1. 상주사절 파견론의 전개 과정 54
2. 주외공관의 설립과 운영 64
小結 81
제2부 청의 駐朝鮮商務署와 近代外交의 胎動 82
Ⅰ. 청의 陳樹棠 파견과 주조선상무서의 설립 82
1. 주조선상무서의 설립 배경 82
2. 總辦商務委員 진수당의 위상과 활동 93
3. 진수당 재임 시기 주조선상무서의 운영 양상 106
Ⅱ. 청의 袁世凱 파견과 주조선상무서의 변화 114
1. 總理交涉通商事宜 원세개의 위상과 활동 114
2. 원세개 재임 시기 주조선상무서의 운영 양상 133
Ⅲ. 주조선상무서의 交涉 창구와 相應 기구 140
1. 주조선상무서와 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의 교섭 관계 140
2. 주조선상무서와 駐津·駐滬使館의 상응 관계 145
小結 152
제3부 청의 駐韓公使館·領事館과 近代外交의 展開 153
Ⅰ. 청의 唐紹儀 파견과 駐朝鮮領事署의 설립 153
1. 總商董·總領事 당소의의 위상과 활동 153
2. 당소의 재임 시기 주조선영사서의 운영 양상 165
Ⅱ. 韓淸修交와 駐韓公使館·領事館의 설립 170
1. 韓淸通商條約의 체결과 근대외교의 개시 170
2. 駐韓公使의 위상과 활동 178
3. 주한공사 재임 시기 주한공사관·영사관의 운영 양상 188
Ⅲ. 乙巳條約과 駐韓·駐朝鮮領事館으로의 축소 196
1. 韓國總領事 마정량의 위상과 활동 196
2. 마정량 재임 시기 주한·주조선영사관의 운영 양상 207
Ⅳ. 주한공사관·영사관의 교섭 창구와 상응 기구 220
1. 주한공사관과 外部의 교섭 관계 220
2. 주한공사관·영사관과 주청공사관·영사관의 상응 관계 223
小結 228
結論 229
參考文獻 237
Abstract 257Docto
近代 渡滿 日本人의 눈에 비친 中國人像
학위논문 (석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사회교육과(역사전공), 2014. 2. 柳鏞泰.본고는 러일전쟁에서부터 본격화된 일본인의 만주 이주 과정을 통해 형성된 중국인상을 밝히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일본인의 제국의식이 크게 작용하였음을 규명하고, 나아가 이것이 그들의 중국인상과 어떠한 관련을 맺으며 진전되어 갔는지를 분석하였다.
19세기 일본의 국가적 차원의 제국화는 일본인으로 하여금 제국의식을 갖게 하였다. 제국의식이란 이족, 이역을 지배하는 제국체제를 형성, 유지, 강화하려는 의식이다. 일본인들은 자국이 대만, 조선으로 팽창하고 청과 러시아라는 강대국을 격파하는 것을 경험하면서 스스로를 제국의 일원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1905년 히비야 폭동은 이러한 일본인의 제국의식이 집단 행동으로 표출된 대표적 사건이었다. 이처럼 일본인들의 제국의식은 도만 이전에 이미 형성된 것이었다.
1905년 포츠머스 조약으로 일본은 여순, 대련을 비롯한 관동주, 그리고 만철 부속지를 획득하였고, 이곳을 통치하기 위해 관동도독부, 만철 등을 설립하였다. 일본의 만주 지배욕은 1915년 남만동몽조약, 1920년대 후반의 만몽 분리를 거치며 점차 강화되었고, 결국 1931년 만주사변으로 현실화되었다. 이러한 국가적 차원의 만주 지배는 도만 일본인으로 하여금 이곳에 대한 제국의식을 형성케 하였다.
이와 더불어, 일본인이 이주한 만주라는 장소가 갖는 공간성은 그들의 제국의식을 더욱 심화시켰다. 관동주는 일본인이 특권을 갖는 장소였고, 이곳에서 자국의 제국 지배를 직접 확인할 수 있었던 반면, 나머지 만주 지역은 관동주에 비해 낙후된 곳이었다. 또한 만주로 이주한 일본인은 식민통치와 관련된 중간층 이상이 많았으나, 중국인들은 주로 산동성, 하북성으로부터 이주해온 빈농이었다. 따라서 일본인의 제국의식은 만주에서 훨씬 강렬해졌고, 이는 실제 여러 행동으로 드러났다. 예를 들어, 일본인들은 그들끼리만 집거하려 하였고, 중국어를 배우려고 하지 않았으며, 만주 오지로의 여행은 꺼렸고, 만주에서 하루빨리 떠나고자 하였다. 특히, 일본인의 중국인에 대한 오만한 태도는 그들의 제국의식이 가장 잘 집약되어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일본인에 있어 만주 체험은 그들의 제국의식을 더욱 강화하는 것이었다.
이에 도만 후 일본인의 중국인상은 다소 변화하였다. 먼저, 무지한 중국인상은 중국인의 신앙이나 교육 수준을 근거로 더욱 구체화되었다. 또한 단결할 줄 모르는 분산된 중국인상도 만주 사회에 널리 유포되었다. 이 두가지 중국인상은 공통적으로 일본의 만주 지배 논리를 강하게 드러냈다. 중국인은 무지하고 단결할 줄 모르기 때문에 제대로 된 국가를 세울 수 없다는 것이었다. 비록 당시 중국의 지식인들도 이러한 중국인상에 공감하였으나, 그들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 노력했던 반면, 도만 일본인들은 이를 근거로 중국, 중국인을 지배해야 한다고 인식하였다.
불결한 중국인상은 만주의 쿠리를 관찰하는 과정에서 더욱 구체화된 인식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은 쿠리뿐만 아니라 중국인 전체로 확대 적용되었고, 때로는 이것이 일본인에 위해를 가하는 요소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범죄자 중국인상은 주로 마적으로 인해 생성된 것인데, 일본 언론의 악의적 보도를 통해 더욱 과장되었다. 이 두가지 중국인상은 주로 일본의 실질적 지배하에 있는 관동주와 만철부속지의 중국인을 통제하는 논리로 활용되었다. 중국인은 불결하고 범죄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일본인들이 적절히 통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중국인은 전차, 기차와 같은 교통수단이나 그 외 생활공간에서 각종 통제를 받았다.
모리배 중국인상은 본디 상업적 재능이 뛰어난 중국인상이 부정적으로 변형된 것이다. 일본인들은 만주의 중국 상인들의 적극적인 이윤 추구 활동을 쉽게 관찰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만주의 일본 상인들은 점차 중국 상인들과의 경쟁에서 열세에 놓이게 되었는데, 이는 그들의 제국의식에 걸맞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일본인들은 중국인의 이윤 추구 활동을 부정적으로 평가함으로써 그들이 처한 불리한 상황을 합리화하였다. 즉, 이는 방어기제로서의 중국인상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도만 일본인의 중국인상은 제국의식과 뗄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었다. 본고에서 분석한 중국인상은 각각 제국의식의 지배논리, 통제논리, 방어기제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제국의식이 투영된 중국인상은 일본 대중에 널리 받아들여져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을 지지하고 합리화하였다. 따라서 이후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으로 이어지는 일본의 침략은 단순히 정치인이나 군부뿐만 아니라, 이를 암묵적 또는 공개적으로 지지한 전체 일본인에 의해 실행된 것이다.
1945년의 패전으로 일본 제국은 무너졌다. 그러나 40여 년 간의 만주 지배 동안 일본인의 심리 깊숙한 곳에 제국의식이 각인되었기에, 그에 의거한 중국인상은 아직까지 일본 사회에 잔존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양국의 관계 회복을 위해 대중 차원의 인식에서부터 문제를 풀어나갈 필요가 있다.1. 序言
2. 日本人의 帝國意識과 滿洲體驗
1) 국가의 滿洲 經營과 帝國意識
2) 민간의 滿洲 移住
3. 일본인의 中國人像과 渡滿 이후의 變化
1) 무지한 중국인, 분산된 중국인 : 支配論理
2) 불결한 중국인, 범죄자 중국인 : 統制論理
3) 모리배 중국인 : 防禦機制
4. 結語Mast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