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research outputs found
正祖代 政局 동향과 華城城役의 추이
올해 1996년은 華城城投이 이루어진지 2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중홍의 극점을 맞았던 정조대 조선의 국력이 기울여지고, 정조의 의지와 신료의 지혜, 그리고 정조대 조선의 사회문화적 역량이 결집되어 완수된 이 국가적 사업으로 우리는 華城이라는 민족문화유산을 갖게 되었다. 오늘 우리는 이 문화유산을 통해 이를 창출한 당대 조선사회 전 부면의 실상과 수준, 지향점을 엿볼 수 있다. 화성성역은 정조대 전반 奎章閣과 勇쏠의 설치에 뒤이어 정조대 후반을 대표하는 사업으로서, 築城 이후 수원의 大都會로의 발전 시책으로 연결되어 정조 말년까지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 정조 24년의 재위기간 중 정조 13년(1789) 永佑園의 水原 遷奉까지가 그 여건 조성을 위한 준비기간이었다면, 장용영의 강화와 연계되었던 화성성역의 추진과 그를 뒤잇는 대도회로의 발전계획, 그리고 농업진흥책의 실시는 정조대 후반기 정조의 원대한 정치적 구상의 실천과정이었다. 현실의 정치적 사회경제적 조건에 제한되면서도 호대한 화성성역을 단기간에 완수하고, 장용영의 강화와 상업 농업 진흥책으로 군사력과 재정을 수원에 집중시킴으로써, 정조와 그 측근관료(近臣)들은 장래를 대비하는 정치적 구도를 실현시켜 갔던 것이다
徐有榘의 學問과 農業政策論
최근까지의 조선후기사 연구성과 가운데 가장 괄목할만한 진전을 보인 것은 사회경제사 분야이다. 1960년대 이후 植民主義史學의 停滯史觀 克服이라고 하는 과제와 연관되면서 진행되었던 이 분야의 연구로 조선후기사회의 발전적 면모들이 밝혀졌으며, 또 어느 분야의 연구보다 앞서서 그를 뒷받침할 수 있는 실증적 자료들이 풍부히 제시되기도 하였다. 그와 함께 조선후기 경제사상의 줄거리를 구성할 수 있는 몇몇 인물들이 주목되고 또 그들의 사 상이 검토되었는데, 柳馨遠·李瀷·柳壽垣·朴趾源·朴齊家·禹夏永·丁若鏞·徐有榘 등의 경제사상이 그것이다. 아직 충분치는 않지만 이러한 연구로 인해 조선후기 사상사의 많은 부분이 새로이 밝혀졌고 앞으로의 연구방향을 고무한 바도 크다. 그런데 이러한 연구들은 연구대상 시기로 불 때, 조선후기 가운데서도 주로 18세기 史에 집중된 감이 있고 상대적으로 19세기 史와 관련된 연구는 많지 않은 것 같다. 경제사상연구에서 연구대상이 되었던 인물들이 茶山 丁若鏞, 楓石 徐有榘를 제외한다면 주로 18세기의 인물들이며, 연구태도에서도 개별인물연구에 집중된 그간의 연구상황 등을 고려할 때, 앞으로의 연구는 그들 사상간의 상호관계와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이 호흡하던 그들 시대사정과의 유기적인 연결에 더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朝鮮後期 開城知識人의 동향과 北學思想 수용
英·正祖代이후 전면적 변화과정에 있었던 朝鮮사회에서는 京·鄭으로의 社會的 分岐와 그에 조응하는 京·鄕으로의 學界分岐가 나타나고 그 가운데 여러 계열의 학풍과 사상적 지향이 나타났다. 이 시기 북학사상은 老論山林의 문하에서 나와 京華士族的 위상을 가지게 되었던 일각의 지식인들이 전통적 학풍과 이념을 수용·변용함으로써 선도하였으며, 그 정점에는 朴趾源·洪大容·李德懋·朴齊家·李書九·徐有榘 등 이른바 燕巌一派의 지식인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물론 북학사상은 조선의 변화된 사회현실 전반에 대응하였던 것으로 단순히 중국을 배우자는 北學論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철학과 문학, 학문관·세계관 몇 현실인식과 현실문제에의 대처로까지 전개되는 것이었다
日錄《公私記攷》에 나타난 19세기 書吏의 생활상
현재의 방대한 奎章閣 자료 중에는 官에서 지속적으로 기록되었던 承政院日記, 日省錄과 謄錄類 자료 외에도 개인에 의해 지속적으로 기록되었던 많은 日錄類 자료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 일록류 자료들은 일견 純組代 이후 世道政局 下에서 권력을 쥐었던 부류들의 從政隨錄的 내용의 일기로서 이른바 京華巨族의 것이 대부분인바 이는 앞으로 19세기사 연구에서 그 활용이 크게 기대되는 一次資料들이라고 하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