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research outputs found

    Seoeoyugo, the Posthumous Works of Kwon Sangshin and its Periphery

    No full text
    본고는 규장각 소장 문집 를 검토하여, 그 저자인 권상신의 작가적 정체성과 위상을 구체적으로 파악하려는 시도이다. 그는 기존에 유만주나 김려 등 조선후기의 특정한 작가들의 글 가운데 자주 등장한 교유인물로서 이들과 동인적 집단을 구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권상신 자신이 이들에 대해 어떻게 여기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언급된 바가 없었다. 의 내용 및 권상신의 후배였던 유력한 인사들이 그를 위해 집필한 생애기록에 따르자면, 권상신의 공적 이력과 그를 둘러싼 사회적 관계망은 19세기 조선의 관료가 이룰 수 있는 최고치에 가까운 성공과 그것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법한 빈틈없는 인간관계의 전형적 양상을 보여주며 이 점은 미관말직에 그쳤던 김려나 사회적인 명망과 거리가 멀었던 유만주와는 퍽 대조적이다. 에 나타난 권상신의 인간관계 가운데 유만주나 김려 등이 차지했던 비중은 극히 미미하다. 오히려 김이양과 같은 관료문인이 그와 대단히 유사한 성향을 보이며 밀접한 교유관계에 있었다고 판단된다. 김이양과 권상신은 전형적인 경화세족의 고위관료로서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여유를 바탕으로 주로 기녀 신분이었던 여성신인들과 현저한 관련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처지와 취향의 유사성을 보인다.This study suggests intensified clarifications about Kwon Sangshin 權常愼 associates which include some writers as Yu Manju 兪晩柱 and Kim Lyeo 金鑢. This significant marginal writers often made mention of their acquaintance Kwon in their works. And he has been regarded as their literary coterie. Being based on the statement of one side, little is known about how Kwon's thoughts for this view was. After a review of Seoeoyugo 西漁遺稿, the posthumous works of Kwon Sangshin, came to the conclusion their relationship should be defined in a different way, not an intimate coterie but an intermittent and vertical relationship focused on Kwon's socio-economic advantages. Kwon's identity as a literary person is concerned with his remarkable socio-economic status. At this point, Kim Yiyang 金履陽 who was a high-ranking government official and a patron of Uncho 雲楚, the courtesan poet could be regarded as Kwon's intimate literary coterie. Kwon Sangshin and Kim Yiyang shows affined relationship overlapping social status as a member of mighty clans of Seoul and an aesthetic literary taste

    유만주의『흠영』 연구

    No full text
    2011년 8월 고전문학 박사학위 논문, 지도교수 박희병 선생

    日記文學으로서의 『欽英』硏究

    No full text
    학위논문(석사)--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국문학 전공,2001.Maste

    Study on Yu man-ju's Heumyeong

    No full text
    학위논문 (박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국어국문학과, 2011.8. 박희병.Docto

    The Compilation of Yeogeoyuhae『譯語類解』 and an Official Interpreter Kim Jinam金指南

    No full text
    본고에서는 기존에 愼以行, 金敬俊, 金指南 세 사람의 공저로 이루어졌다고 알려진 『譯語類解』와 그 주변자료를 검토하여, 이 어휘집의 편찬에 譯官 김지남이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음을 밝혔다. 먼저 29세의 김지남이 1682년 일본 통신사의 압물통사로 수행했을 때 쓴 『東槎日錄』의 내용을 분석하여 그가 당대 漢語의 발음과 관련하여 치밀한 전문성을 체현하고 있었다는 점과, 외교의 실무자로서 식견과 수완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을 확인했다. 1680년대 閔鼎重이 司譯院 提調로 재임하며 偶語廳을 설치하고 외국인을 교수자로 채용하여 역관의 어학 능력을 증진시키는 정책을 펼쳤을 때 김지남은 젊은 한어 역관으로 그러한 교육정책의 대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중 두각을 나타내어 『역어유해』와 같은 사역원의 교재를 편찬할 실무자로 지목되었던 것이다. 그는 이론과 실제에서 공히 역량을 보유한 전문직 종사자로서, 이런 그가 50대 중반의 두 선임자를 대신하여 편찬 실무를 주관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후 그의 장남 金慶門은 『通文館志』를 편찬하면서 부친을 돕는 것을 넘어서서 편찬의 실무를 담당했다. 김경문의 아들 金弘喆은 조부의 저술인 『역어유해』를 계승하여 보완한 『譯語類解補』를 편찬하고 跋文을 붙여 간행함으로써 『역어유해』라는 일련의 저술을 완간하고 전문 직업인으로서의 뚜렷한 자각은 물론 역관 가문인 牛峰金氏로서의 자부심까지 드러냈다. 이 점에서 어휘집 『역어유해』는 중인에 대한 신분적 차별 가운데서도 김지남 三代의 가업이 성실히 이어졌음을 증언하는 하나의 자료가 된다

    Self-consciousness and self-definition of one marginal gentry : focused on Yu manjus Heumyeong

    No full text
    이 글은 흠영 에 나타난 유만주의 자의식과 자기규정의 양상을 사대부 신분이라는 공 적 차원과 가계의 계승자인 적장자라는 사적 차원에서 분석하고자 한 시도이다. 먼저 공적 차원 에서 유만주는 자신이 속한 신분인 사대부의 존재의의 내지는 계급적 특성을 사환(仕宦)이라는 직분과 지식인으로서의 가치에서 찾고 있다. 그는 여기에 입각하여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신의 처 지를 실직한 선비와 부유(腐儒)로 범주화한다. 다음으로 사적 차원에서 유만주의 존재형태는 살아있는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자리를 이탈하여 죽은 아버지의 아들이 되어야 했던 뿌리뽑힘의 경험, 그리고 계속해서 두 아버지 사이를 부유해야 하는 삶에서 오는 정체성의 혼란으로 규정된 다. 또한 자신이 유전적으로는 죽은 아버지를 계승하고 있다는 점은 시간이 흐를수록 유만주의 삶에 육박해 오며 결국 살아 있는 아버지를 닮지 못한 불초자로 자신을 규정하게 하는 기제로서 작동한다. 이처럼 공사영역에 걸친 그의 자기규정은 사대부의 직분, 지식인으로서의 존재의의, 가 부장을 계승하는 적장자의 자격 등 자신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 없다는 것, 즉 결여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일관되다. 이와 같이 결여에 주목하는 자기규정의 방식은 현실의 경험 세계에서 유만주가 자기를 인식하는 태도의 근저를 이루며 그의 일기의 한 특질을 이루는 자조 적(自嘲的) 측면과도 닿아 있다고 여겨진다

    Yu Manju兪晩柱's Way of Reading Qian Qianyi錢謙益

    No full text
    전겸익(錢謙益, 1582-1664)은 중국 문학사에서 명말청초(明末淸初) 문단의 영수로 평가받는 유력한 문인이다. 중국과 같은 문자를 사용한 역사가 길었던 조선의 지식인들에게 전겸익은 대가급의 주요 문인으로서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인물이었고, 이런 사정은 전겸익의 말년에 해당하는 17세기 중후반 이래 (列朝詩集)을 비롯한 전겸익의 저술이 조선에서 활발히 유통되었던 상황에 반영되어 있다. 한편 전겸익의 생애는 명나라가 멸망하고 이민족 왕조인 청나라가 세워지는 중국 근세의 격변기와 맞물려 있는데, 이때는 조선으로서도 막대한 위기의 상황으로, 명나라가 멸망한 것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청나라의 침략에 따른 물질적이고도 정신적인 손상을 경험한 시기였다.Manju兪晩柱, when he was 23 years old, had read through most of writings of Qian Qianyi錢謙益 in a mere two months. He held Qian' s works in esteem and sympathized with him. But since Qian' s name was branded with infamy for his disloyalty to the Ming dynasty and his works were censored by the Qing court, Joseon朝鮮 intellectuals generally despised him for his equivocal behavior and double identity. And Qian's some disparaging remarks about Cllinese writing style of Joseon in "An afterword to Huánghuájí跋皇華集 caused some kind of nationalism and public indignation among Joseon intellectuals. So Qian's works had been understudied and misinterpreted in Joseon Instead of being obsessed with some unfriendly comment of a foreign writer, Yu Manju focused on Qian's voluminous work itself and explored the complexities of life and mind of him. As a result, he could understand accumtely Qian, the eminent writer of the Ming-Qing明淸 dynastic transition, reputing him as both a literary critic and historiographer. Yu's way of capacitive reading Qian as a foreign writer of modern times is still valid and meaningful

    “The Empirical Time in the Diary Humyeong”

    No full text

    「방한림전」에 나타난 지기 관계 변모의 의미

    No full text

    Yu Manju's way of reading Shuihuzhuan

    No full text
    corec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