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research outputs found

    霅橋 安錫儆의 散文 硏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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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위논문(석사)--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국문학전공,2006.Maste

    A study on Hong Baek-changs Dongyugis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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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위논문 (박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국어국문학과(국문학전공), 2014. 2. 박희병.본고는 조선 후기 문인인 농재(儂齋) 홍백창(洪百昌, 1702~1742)의 금강산 유기(遊記) (東遊記實)의 창작의식과 표현상의 특징을 고찰하여 그 의의를 파악하는 데 목적이 있다. 먼저 의 일본 정가당(靜嘉堂) 소장본과 규장각(奎章閣) 소장본의 두 이본(異本)을 비교하여 다양한 이본이 있었을 가능성과, 서울편 분권(分卷)이 있었던 점, 그리고 두 이본에서 각각 확장과 축약이 이루어졌음을 확인하였다. 다음으로 홍백창의 생애와 저술을 살폈다. 홍백창은 당송(唐宋) 시문과 강서시파(江西詩派)의 시풍을 익혔고, 도가(道家)와 불가(佛家)에 깊은 조예가 있었다. 또한 그는 역대 시화와 시평을 선집한 총서와 역사비평서를 저술하였다. 이어 의 창작배경과 창작동기를 고찰하였다. 창작배경으로는 금강산 유람과 산수유기의 성행을 살폈다. 금강산 유람이 유행하게 된 요인으로 16~17세기 중국과 일본으로부터 은이 대량 유입되어 조선에서 은화의 유통이 활발해진 상황을 살펴보았다. 화폐경제의 성장으로 부가 축적되면서 상층은 물론이고 사대부와 일부 중인(中人) 역시 문화에 대한 욕구가 상승하였다. 또 장기간의 금강산 유람 경비를 마련할 수 있는 경제적 여건이 이루어짐에 따라 금강산 유람이 전국적으로 크게 유행하였다. 특히 사대부의 유람은 관청과 사찰에서 다양한 방면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지리학의 발달로 금강산에 대한 지리적 정보가 양적·질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고, 이는 보다 편리하게 금강산을 유람하는 계기가 되었다. 더불어 교통망의 개편과 상업도시의 발전으로 인해 여행자와 숙박업소의 수가 증가하였다. 다음으로 산수유기의 성행 양상을 살피기 위해 당시 명대(明代) 유기의 열독(熱讀) 양상을 고찰하였다. 조선 문인들은 중국 유기를 선집하는 과정에서 취향과 편찬의도를 드러내었다. 중국 유기의 독서는 조선 산수 유람의 욕구를 일으켰고, 중국 유기의 인용은 조선 산수의 기이함과 아름다움에 주목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더하여 고려후기부터 18세기까지 창작된 금강산 유기를 조사하여, 17~18세기 유기의 왕성한 창작 양상을 고찰하였다. 이전 세기에 비해 유기는 두 배 가량 작품수가 증가했고 장편화의 경향이 나타났으며, 문체가 더욱 다양해졌다. 또 한양뿐 아니라 지방에서도 와유록(臥遊錄)의 편찬이 이루어졌다. 이어, 창작동기로 새로운 산수유기 문학의 모색을 고찰하였다. 홍백창은 여러 차례의 과거 낙방으로 의기소침해 있었는데, 금강산을 유람하며 도가와 불가에서 마음의 안정을 찾고, 무명(無名)의 기이한 승경(勝景)에 자신의 불우한 운명을 의탁하며 스스로를 위로하였다. 이와 함께 을 통해 문재(文才)를 발휘하려는 욕구를 지녔다. 이에 당시 명편으로 꼽힌 김창협(金昌協)의 「동유기」(東遊記)를 의식하며, 이와 차별화된 새로운 유기를 창안하고자 하였다. 에 대한 본격적인 고찰로서, 이 책에서 금강산 체험이 총서적(叢書的)으로 구성된 양상을 살펴보았다. 는 「문일기」(文日記), 「잡저」(雜著), 「구일기」(句日記)의 세 층위로 구성되어 있다. 「문일기」는 일록체(日錄體) 유기에 독립적 기문이 삽입되어 있고, 「잡저」는 다양한 문체를 사용하여 정보의 집성(集成)을 이루며, 「구일기」는 서경(敍景)이 핍진(逼眞)하게 묘사되고 노정(路程)이 재현된다. 또한 세 층위의 서술이 홍백창의 금강산 여행체험을 다면적으로 재현하고 있으며, 각 서술이 상호 유기적 관계를 맺으며 총서로서 통합을 이룬다. 다음으로 의 작품세계를 궁탐정신(窮探精神)의 형상화, 금강산 관련 학지(學知)의 집대성, 주변부 인물에 대한 관심의 세 가지로 나누어 고찰하였다. 궁탐정신의 형상화를 살피기 위해, 승경(勝景)의 가치에 대한 주목, 도전과 극복 과정의 서사, 세밀한 관찰과 정확한 묘사의 세 가지 양상을 고찰하였다. 에서 홍백창은 선대 문인이 밟지 않은 비경(秘境)을 소개하고 선대 문인의 유람보다 더 나은 유람 방식을 모색하면서, 승경을 보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여정을 상세하게 서술한다. 그 서사의 양상이 매우 실감나고 사실적이며, 수차례의 기복을 통해 긴장감이 유지되고 있다. 이와 함께 비경에 대한 세밀한 관찰과 정확한 묘사가 이루어져 기록의 신뢰도를 높이고 있다. 금강산 관련 학지의 집대성을 살피기 위해, 여행체험의 정보화, 인문지리 지식의 체계화, 새로운 인식의 정립의 세 가지 양상을 고찰하였다. 에는 유람객에게 필요한 실용적인 정보와 금강산에 대한 지식을 확장하고 심화시키는 지식이 풍부하게 들어 있다. 또 인문지리 지식을 항목별로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효용성을 높이고 있다. 이러한 정보화와 지식화를 기반으로 금강산에 대한 통념에 대해 예리한 반론이 제기되며, 금강산 유람의 본보기로 숭상된 선대 문인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이루어진다. 이를 통해 이전 유람객들의 금강산과 금강산 유람에 대한 시각과 차별된 새로운 인식을 정립하고 있다. 주변부 인물에 대한 관심을 살피기 위해, 승려에 대한 이해와 옹호, 도사의 기이한 행적 탐문, 평민 계층과의 소통의 세 가지 양상을 고찰하였다. 에는 승려의 삶을 이해하고 옹호하는 홍백창의 시각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더불어 도사의 행적을 찾는 과정이 세밀하게 그려지고 있다. 또 평민 계층의 삶의 양태가 그들 자신의 목소리에 담겨 서술에 활기를 더한다. 이상의 논의를 기반으로 의 문학사적 성취와 영향을 살펴보았다. 당대 은 금강산 유기의 대표적 작품으로 꼽혔다. 이 완성된 지 얼마 안 되어 필사본이 문인들 사이에 유통되었으며, 그 명성이 오래 지속되었다. 또 김창협의 「동유기」와의 비교를 통해 의 특징을 살펴보았다. 의 장처(長處)는 실제 험지(險地)의 답사를 통해 얻을 수 있었던 실증적인 서술과 긴장감 넘치는 전개, 정확하고 풍부한 정보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러한 성향을 지닌 홍백창의 은 당색을 넘어 많은 문인에게 영향을 끼쳤다. 즉 은 남인(南人)의 고증적 서술과 노론(老論)의 서정적 묘사의 결합을 이루는 데 한 획을 담당하여 금강산 유기의 수준을 한 차원 올렸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본고는 홍백창의 의 구체적인 작품세계를 처음 탐구하여, 그간 주목되지 않았던 18세기 전반에 나타난 유기의 총서적 성향과 그 면모를 자세히 밝혔다.Ⅰ. 서론 1. 연구사 검토 2. 자료 개관 Ⅱ. 홍백창의 생애와 저술 Ⅲ. 의 창작배경과 창작동기 1. 금강산 유람과 산수유기의 성행 2. 새로운 산수유기에 대한 욕구 Ⅳ. 금강산 체험의 총서적(叢書的) 구성(構成) 1. 세 층위의 구성 1) 「문일기」(文日記): 일록체(日錄體) 유기(遊記)와 기문(記文)의 삽입 2) 「잡저」(雜著): 다양한 문체와 정보의 집성(集成) 3) 「구일기」(句日記): 핍진한 서경(敍景)과 노정(路程)의 재현 2. 금강산 체험의 총체화 Ⅴ. 궁탐정신(窮探精神)의 형상화 1. 승경(勝景)의 가치에 대한 주목 2. 도전과 극복 과정의 서사 3. 세밀한 관찰과 정확한 묘사 Ⅵ. 금강산 관련 학지(學知)의 집대성 1. 여행체험의 정보화 2. 인문지리 지식의 체계화 3. 새로운 인식의 정립 Ⅶ. 주변부 인물에 대한 관심 1. 승려에 대한 이해와 옹호 2. 도사의 기이한 행적 탐문 3. 평민 계층과의 소통 Ⅷ. 의 문학사적 성취와 영향 Ⅸ. 결론Docto

    Outsider's landscape sightseeing during the Joseon Dynasty: Focusing on Choogang Nam, Hy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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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문인들에게 산수유람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을까? 산수유람은 이들에게 호연지기를 기르는 계기가 되기도 했고, 문학창작의 산실이 되기도 했다. 또 문인들은 산수유람을 통해 백성들의 삶을 관찰하기도 하고, 벗과 풍류를 즐기는 여유를 누리기도 했다. 조선시대 문인들이 산수를 어떻게 인식했고, 산수유람을 통해 무엇을 얻었으며, 유람의 체험을 문학적으로 어떻게 형상화했는지 살피는 것은, 우리 삶 속에서의 자연의 의미와 자연과 문학의 관계를 되짚어보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거시다. 조선전기 문인인 추강 남효온(1454-1492)은 산수벽으로 유명한 문인 중의 한 명이다. 그는 금강산, 지리산, 개성 등을 유람하고 여러 편의 산수시와 산수유기를 남겼다. 선행연구에서 남효온은 조선전기 방외인으로 분류되었고 그의 문학 또한 방외인 문학을 대표하고 있다. 남효온은 현실세계에서 뜻을 펴지 못했고, 그에 따를 실의한 마음을 술과 방랑으로 극복하고자 했다. EH한 그의 시세계에는 선계를 지향하는 의식이 나타나고 있다. 본고는 남효온의 산수유람이 취향과 수향 및 신선사상과 긴밀한 연관성을 맺고 있다고 보며, 이 관련 양상을 파악하여 산수유람이 남효온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는지 밝히고자 한다. For Nam, Hyo-on(南孝溫), landscape has something in common with "Soohyang (睡鄕)" and "Chweehyang (醉鄕)." "Soohyang (睡鄕)" and "Chweehyang (醉鄕)" as well as landscape are the space where people can stand aloof from real life while forgetting any distress and agony in life. However, scenic beauty cannot guarantee a permanent pleasure just like "Soohyang (睡鄕)" and" Chweehyang (醉鄕)" only guide us into temporal pleasures. Nam, Hyo-on cherished his own yearning and curiosity toward leading an immortal life in nature. He quested for becoming a supernatural existence through regimen and tried to feel immortality during landscape excursion where he freely manifested his thinking across Confucianism or Taoism. No doubt he suffered from his failed ambition in the real society throughout the life. Nevertheless, he found solace from natural scenery, embodied such pleasure from landscape in literature, and broadened overall horizons over life. In other words, landscape acted as not only his literary source but also his spiritual solace where he eagerly hoped to live forever

    A study on the Dream and Self-expressionn of in 18-19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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