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research outputs found

    A Picture of the Scholar-Official(土大末 Shia-Ta-Fu) in the Transitional Period of Late Nan-Pei Ch'ao(南北朝) and Early Sui (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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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顔氏家訓」은 南朝 梁에서 隋의 統一初에 까지 生存한 顔之推(A. D. 531-591+?)에 의해 著述된 子孫의 繁榮과 家門의 永續的 發展을 目的한 訓戒書의 一種이다. 顔之推가 生存했던 時期는 魏晋時代 이래 계속 維持되어 온 이른바 「貴族制」 社會가 南北兩朝에서 內的, 外的 要因으로 變化의 조짐을 마련하여 隋·唐이라는 異質의 統一帝國이 形成되어 가는 過渡期에 해당한다. 旣往의 硏究成果에 의하면 이 變化의 決定的 契機는 南朝의 경우 梁末 侯景의 亂에 의해, 北朝의 경우 北魏末 北鎭 城民의 亂에 의해서 마련된 것으로 理解되고 있다. 특히 南朝의 경우 魏晋이래 政治·社會 各部門에서 固定的으로 支配階層으로 君臨해 왔던 貴族階層들은 東魏에서 歸付해온 侯景의 叛亂과 뒤이은 西魏의 侵攻으로 그들의 旣存權益이 剝奪되고 그들이 根據한 社會基層은 거의 破壞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 變亂속에서 당시 대부분의 貴族들은 捕虜의 몸으로 北朝로 押送되어, 그때까지 頻繁한 王朝變革에도 불구하고 固定的으로 그들의 地位를 保持해 온 경우와는 質的인 差異를 切感하게 되었다. This study aims to understand comprehensively some aspects of change especially through the mental change of the ruling class of the day by analyzing Yen-shih Chia-hsün written by Yen Chi-tui, a scholar-official who lived in the disintegrated period of the Great family Arisocrats 〔門閥貴族, Men fa kuei tsu) society in the later term of Nan-pei Chao and the earlier term of Sui. Yen Chih-t'ui belonged to the aristocrats of the Southern Dynasties. He candidly accepted his position deprived of the privileges and benefits bestowed upon the ruling class and tried to adapt himself to the change of his society. In this study I focused on four points which have been neglected in the precedent studies achieved by other scholars

    The Establishment of "the sino-barbarian system" and "the Unified system" during Fu-chien''s Reign in Earlier Chin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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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五胡北朝時代를 거시적으로 파악할 때 胡漢砾合體制와 統一體制를 구축해가는 過程으로 이해할 수 있다면 前秦 持堅政權의 時期는 두가지 體制의 구축의 과정에 있어서 躇期를 이루는 중요한 時代로 평가 할 수 있다. 즉 持堅政權은 民族間의 矛盾과 葛藤을 극소화시킨 政權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또한 群小政權의 亂立을 극복하고 華北地域이나마 統一이룩하였고 江南 漢人政權인 東晋을 병합시켜 보다 완벽한 胡漢統一體을 制를 성취하기 위해 시도된 淝?水戰은 그 失敗에도 불구하고 후의 隋의 統一까지 지속되어온 北方의 南方進出의 시발점이 되었으며 苻堅이 가졌던 統一에 대한 강한 執念은 北方의 諸王朝의 統一政策에 지대한 영향을 가져다 주었다고 할 수 있다

    北魏的對民政策與均田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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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는 前稿에서 均田制가 督課(割當生産)制의 특징을 갖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다시 그것을 補完·證明하기 위해 몇 가지 사항에 대해서는 추후에 발행할 後橋에 다루겠다고 약속하였다. 1) 均田制 상의 作物別의 區分, 즉 일반 곡물(粟 稷 등)과 桑 麻 楡 棗 등을 재배하는 田地의 區分이 中國 田制史上 최초로 나타난 원인, 2) 均田制와 도시구획제도인 坊制 출현의 연관성, 그리고 3) 身分制上의 隷屬民의 다양한 分化와 督課制와의 관련성 4) 당시 國際貿易品과 均田制와의 연관성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사항들은 모두 北魏王朝의 對人民政策(이하 對民政策이라 약칭함)과 연관을 깊게 맺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均田制를 단순히 田制(土地制度)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北魏王朝가 추구한 對民政策의 하나로서 파악해야 균전제가 지닌 의미를 제대로 규명해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본고에서는 약간의 순서를 바꾸어 그것은 1) 均田制와 도시구획제도인 坊制 출현의 연관성 2) 身分制上의 隷屬民의 다양한 分化와 督課制와의 관련성 3) 均田制 상의 作物別의 區分, 즉 일반 곡물(粟 稷 등)과 桑 麻 楡 棗 등을 재배하는 田地의 區分이 中國 田制史上 최초로 나타난 원인, 4) 당시 國際貿易品과 均田制와의 연관성 등을 검토하려 한다. 필자는 前稿에서 均田制가 督課(割當生産)制의 특징을 갖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다시 그것을 補完·證明하기 위해 몇 가지 사항에 대해서는 추후에 발행할 後橋에 다루겠다고 약속하였다. 1) 均田制 상의 作物別의 區分, 즉 일반 곡물(粟 稷 등)과 桑 麻 楡 棗 등을 재배하는 田地의 區分이 中國 田制史上 최초로 나타난 원인, 2) 均田制와 도시구획제도인 坊制 출현의 연관성, 그리고 3) 身分制上의 隷屬民의 다양한 分化와 督課制와의 관련성 4) 당시 國際貿易品과 均田制와의 연관성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사항들은 모두 北魏王朝의 對人民政策(이하 對民政策이라 약칭함)과 연관을 깊게 맺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均田制를 단순히 田制(土地制度)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北魏王朝가 추구한 對民政策의 하나로서 파악해야 균전제가 지닌 의미를 제대로 규명해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본고에서는 약간의 순서를 바꾸어 그것은 1) 均田制와 도시구획제도인 坊制 출현의 연관성 2) 身分制上의 隷屬民의 다양한 分化와 督課制와의 관련성 3) 均田制 상의 作物別의 區分, 즉 일반 곡물(粟 稷 등)과 桑 麻 楡 棗 등을 재배하는 田地의 區分이 中國 田制史上 최초로 나타난 원인, 4) 당시 國際貿易品과 均田制와의 연관성 등을 검토하려 한다. 本文旨在對學術界以往所提出的關于均田制的研究傾向, 從另外一個角度加以分析. 即將均田制作爲征服主朝之北魏所實行的一項對民政策來加以把握. 筆者認爲, 由于從北朝到隋唐, 均田制作爲一項對民政策已經制度化了, 所以有必要將其與其他制度相比較而進行研究. 因此, 本文中試着將當時獨特的域市結構之坊牆制與多種隸屬民戶所出現的身分制, 作爲解釋均田制的傍證資料來使用. 即如果說坊牆制是針對手工業者的一項對民政策, 那麼, 均田制就可以看作是在鮮卑拓跋族對中原進行統治的過程中所出現的計口受田制的延長過程師存在的一項針對農民之政策. 這樣, 坊牆制就可以看作是在與計口受田制或均田制類似的對民政策之方向中所出現的, 如果說, 爲了向手工業者指定居住地, 配定要生產的商品使之從事生產而出現了坊牆制, 那麼, 爲了向手使農民種植穀 桑 榆 棗等, 就出現了計口受田制和均田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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